매체 씻기
이문석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폼페이의 인간 화석과도 같은 잿빛 조각 여섯 점이다. 멀리서는 거친 자연석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종이를 파쇄해 만든 종이죽이 말라서 갈라진 표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이은지는 입체조형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과월호 잡지와 길가에서 받은 전단지, 동료 작가가 쓰고 남은 종이, 그리고 자신이 제작한 드로잉 등을 세단기로 조각냈다. 세단기를 통과한 종이는 침엽(針葉)보다 굵고 활엽(闊葉)보다 가늘어진다. 이때 평면 위에 쓰여있던 수천 자의 텍스트와 삽화들은 완전히 분쇄된다. 작가는 수북한 종잇조각들을 물에 불린 뒤, 되직한 반유동체(半流動體)로 만든 뒤 조형물의 얼개 위로 얹고 말려서 입체물의 표피로 사용한다. 이따금 완전히 풀어헤쳐 진 종이죽이 되지 못한 종이 이파리들이 드문드문 드러나고 이 작은 종잇조각들 위로 이전 기록물이 흔적이 비친다. 어떤 관객들은 분명 그 작은 단서 가까이 다가가 이 조형물을 구성하는 출처들을 떠올리려 했을 것이다. 출처에 대한 흔적은 다가가야 확인할 수 있지만, 출처 일부는 거친 표피의 입체물 주변을 감싸는 벽면에 걸려있다. 열한 점의 먹빛 드로잉들이 바로 아래의 조형물에 사용된 재료는 아니다. 다만 벽에 걸린 열한 점과 같은 드로잉이 종이죽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열한 점의 드로잉은 여섯 점의 조형물의 레퍼런스를 상상하게 만들고, 여섯 점의 조형물 표면에서 우리는 문득 열한 점의 드로잉을 떠올리게 되는데, 바닥과 벽면의 작업들이 서로 과거와 미래를 순환하며 지시하는 이 시스템에 대해서 우리는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비된 레퍼런스로서의 드로잉과 예정된 결과물로서의 조형물이 마주 보는 이 시스템은 서로 어떤 시간대에 대한 응답인가?
종이라는 매체 자체가 식물성 섬유질을 뒤섞어 액상화시킨 뒤, 이 합성물질을 말려서 만든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이 기록매체의 재생사이클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을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종로구 세검정(洗劍亭) 부근에는 조선시대 관청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제작하고 보관하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알다시피 세검정 앞에는 홍제천(弘濟川)이 흐르는데, 이 개천에서 역사의 초고를 씻어 없애곤 했다. ‘실록(實錄)’은 국왕이 사망할 때, 이 남성 지배자의 재위기간 벌어진 일들을 적어 놓은 역사책이고, 이 기록의 초고들은 모두 이 개천의 물로 씻어냈다. 역사적 이견의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 종이 섬유 사이에 달라붙어 있던 식물성 그을음은 하류를 향해 버려진다. 이 과정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세초는 국왕의 재위 시기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물을 물로 씻고 재생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같은 현상에 대한 기록끼리 경합이 벌어지고, 특정 기록은 고급지 위로 옮겨가며, 이후 기록 간의 알력이 벌어졌던 모든 매체는 세절되고 종이죽이 된 뒤, 재생 휴지로 보관된다. 기록의 해석을 좁히기 위함과 동시에 매체의 값어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초 과정을 눈여겨 본다면, 종이라는 기록 매체의 생태계를 순환하지만 기록 그 자체가 순환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세초는 특정 기록의 위상 때문에 벌어지는 기록의 약육강식이다. 기록을 선택하는 힘은 일종의 낙차가 되고 기록물은 그 낙차의 힘에 의해 순환하게 된다. 기록매체의 특성과 기록 간의 투쟁이 엮이면서 식물성 섬유질은 조각나고 물에 씻기고 반죽 되다가 마르고 펴지고 다시 기록의 현장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종이라는 기록매체의 재생사이클을 이용한 작가 이은지의 작업에는 특정 기록이 승리하는 상황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잡지에서 예전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면이 세절되기에, 특정 품질이나 형태의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기록물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시공간에는 종이풀을 굳힌 입체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드로잉이 입체물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므로, 우리는 작가가 종이죽 상태 혹은 말라서 굳은 상태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록물들은 서로 경합하지 않고 나란히 종이죽이 되는데, 이때 조형물의 표면은 일종의 중립지대가 된다. 평면과 입체에는 위계는 없고, 다만 평면이 레퍼런스로 입체가 잔여물로 남는 기묘한 생태계를 창출하는 그 자체가 작가의 목적처럼 보인다.
잔여물이라는 뜻의 <leftover> 연작에 대하여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섬유직 조직체로서의 종이의 잔여물이라는 의미와 기록매체로서의 종이의 잔여물이라는 의미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때 종이는 혼합된 재생지를 기원으로 가지는 물건이면서 오랫동안 기록의 장으로 대우받는 사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이는 전자의 성질과 후자의 용도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재생 가능한 기록물에 대한 갈망이 종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진 것이기에 그러하며, <leftover> 연작은 재생과 기록의 매체라는 특징을 통해 새로운 작업의 파편들을 만들어낸다. 이 파편들은 시공간적 제약을 뚫고 문자 기록을 고정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흔적이며, 어떤 기록(신작)을 위해 분쇄된 잔해, 둘 다를 보여준다. 기록의 생사가 한 매체의 가장 주요한 두 가지 특질로부터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2016년부터 제작된 <leftover 03>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반대로 겹친 형태 위에 많이 불린 상태의 종이죽이 얹어졌기에 이전 기록의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2019년에 제작된 근작들은 대부분 종이 그 자체를 틀로 삼고, 덜 갈린 파편이 그 위에 서거나 종이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러붙은 듯한 파편들이 보인다. 액상화되어 있는 종이 반죽은 점차 시간이 지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굳는다. 마른 종이 표면은 쭈그러들고 갈라지는 등, 된 반죽의 표면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종이 반죽은 처음 얹어졌을 때보다 쪼그라들어서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었다. 응고된 움직임은 대개 넘어지는 찰나를 참조한 것이거나 영상물이 멈춘 상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종이의 재생 사이클의 특정 상태 즉 종이죽 상태로 자신의 작업을 머물게 하듯이, 그 형태는 늘 어떤 정지된 움직임에서 머물고 있다.
정지화면처럼 보이는 조형물들은 종이라는 매체의 특정 상태를 맴돌게 한 것과 연관이 있을까? 앞서 평면 작업들은 입체 작업의 질료로 사용된다는 얘기를 전했다. 입체의 형태적 매체적 참조점이 벽면의 드로잉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에 즉답하기를 미루고, 드로잉에 시선을 할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군상이 들어선 뒤로, 먹색의 구근 형태 여럿이 둘러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거친 숨>과 <breathing space>는 손이나 주먹 그리고 하반신의 뒷모습이 구근과 자주 겹쳐서 표현된다. 육중해 보이는 묘목의 나무 뿌리 부분들에는 흙이 둥글게 고정되어 있다. <downtime>과 <호흡> 시리즈는 수성 흑연을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짧은 흑연의 스트로크와 먹선의 중간값이 추출되었다. 스트로크가 번지면서 광물성 탄소 성분은 부드럽게 산포되어 덩그러니 놓인 묘목과 굴곡진 지표면처럼 보이는 엎드린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헐떡임>은 땅덩어리의 질감 또는 바람에 휘날리는 수풀의 운동감이 흑연 스트로크로 표현되어 있다. <Wheezing>은 만화적인 기법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질 것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작가는 신체와 결부된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풀다가, 더 직관적으로 묘사하기로 선회하는 결과는 나무의 형상이었다고 전한다. 특히나 동아시아 회화사 안에서 인간이 종종 비인간 생명체나 무생물에 투영되었음을 참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 형상을 식물로 유비하는 것의 상징적 기원만으로 이은지의 작업이 종이라는 매체의 특정 상태, 즉 종이 반죽으로 자꾸 향하게 되는지를 답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드로잉 위로 구근 형태가 자주 비치고, 조형물은 정지 상태의 운동감을 표현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더 조밀한 연결고리를 요한다. 작가는 자기 작품의 이동이 보다 용이해지기를 바란다는 현실적인 소망을 내비친 적이 있는데, 이 지점이 실마리가 될지 모르겠다. 조형물의 무게는 가벼운 데에 비하여, 나무 화판은 옮기기에 무거워 제작 방식을 달리할까 한다는 그 고민은, 매체의 상태와 질량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매체의 문제, 작가는 시종일관 매체에 대하여 고민했다. 평면 자연물들의 등장과 동작이 멈춰버린 ‘잔여물’ 형상이라는 애매한 상태들의 연결고리는 매체성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애매한 상태’를 드러내고자, 이번 전시의 제목을 그 비유로서 ‘숨 참기’라고 표현한 것은 그 애매한 매체성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생과 기록의 매체로서의 종이 이야기를 해보자. 다시 ‘세초’의 풍경에 대해서 말이다. 세초를 하는 날,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가 열렸다고 한다. 선택된 실록은 가마까지 태워져서 궁궐로 들어가고, 선택에서 배제된 기록들과 초기 기록들은 모두 물에 씻겨 사라진다. 선택되지 못한 기록이 파기되는 날은 선택된 기록이 완성되는 날이다. 우리는 기록들의 동족살해와 축제가 한 번에 벌어지는 세초연을 기록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은지의 작업실에서 먹빛 드로잉과 잿빛 조형물은 기록의 완결이나 탄생을 축하하는 동족살해가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인간 화석 같은 입체물이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이 애매함의 생태계 안에서 어떤 기록도 어떤 기록물도 어떤 기록매체도 우위를 가지지 않기에 기록 권력의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은 때로 자신의 드로잉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 작업 역시 공평하게 잡지와 함께 세절되고 물에 불려지고 입체가 될 따름이다. 특정 형태인 종이죽으로 계속 귀결되는, 그래서 고요하면서도 근면하게 종이는 파쇄되고 기록은 흐릿해진 뒤, 매체의 생태계를 유지한다. 더군다나 작가는 자기 작업의 시각적 정보 중에서 색을 특정 값으로 몰아두면서, 그 관심을 매체에 더하고자 한다. 색에 대한 해석을 최소화하고 매체성에 대한 해석으로 집중시키기 위하여 작가는 먹빛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형태는 다른 형태가 아니라 먹빛의 형태로서 인식된다. 그리고 사실 인쇄물을 분쇄하여 물에 불려 분해시키면 인쇄물의 CMYK(Cyan, Magenta, Yellow, Black) 값이 섞여서 무채색 계열에 가까워진다. 종이매체를 특정 상태로 자꾸 귀결시키는 것은 매체성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그 매체가 서로 엉겼을 때의 상태, 먹빛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채도의 0도 값도 명도의 0도 값도 아닌, 종이 위에 먹이 안착했을 때의 빛과 그 종이를 불린 뒤 서로 엉겼을 때의 빛인 것이다. 그 빛깔은 색상을 차단한 결과가 아니라 특정 색의 스펙트럼을 선택한 결과로서, 엄연히 작업의 일환이다. 매체에 대한 연습은 하나의 생태계가 되어서 평면에서 입체로 한결같이 흐르고 있고, 완결되지 않는 연습의 상태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입체로 드러난다. 무자비하게 평면이 입체의 표피가 되도록 갈리고 녹아나는 작업이 반복되는데, 이 생태계의 창출은 ‘먹색의 매체’의 분진이 쌓이며 형성된 인간 화석으로 남는다.
작가 이은지는 종이가 먹빛과 잿빛 등의 무채색을 머금는 작업을 지속하는 듯 보인다. 무채색은 먹이나 수성 흑연이 종이 위에 안착되며 발현된다. 식물성 섬유조직 안으로 액상화된 탄소 성분이 파고들면, 그 밀도와 분포, 너비 등에 따라 흑과 백 사이의 레이어들이 물결 짓게 된다. 무채색의 물결은 때로 물길처럼 가로로 세로로 줄지어 가며 흰 바탕 위의 검은 문자로 남는다. 동아시아 기록시스템의 중추는 마른 탄소 성분이 주렁주렁 매달린 식물성 섬유질이다. 오랫동안 기록은 말을 글로 남기기 위해, 흑백의 숲길과 흑백의 물길에 빚져왔다. 대부분의 기록은 뒤엉켜 있는 흑백이 오랫동안 그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검은 물길은 마른 채로 오래기를 바라고, 식물성 섬유질의 가지 위에 한결같이 검은 과실이 맺혀 있기를 바라는, 바로 이 변치 않는 형태의 전승이 문자기록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은지의 기록매체에 대한 연습은 바로 이 기록물의 오래된 역할인 변치 않는 전승을 한 방향으로 모두 몰아 두곤 한다. 이때 과거에 자신이 시도한 매체 연습은 흐릿해진다. 먹빛의 드로잉들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말라버린 흑백의 물길은 터지고, 식물성 섬유질은 물에 잠겨 매달린 탄소 성분들이 쓸려나가버린다. 작업의 궤적은 겹겹이 쌓여 나아가다 걸쭉한 유동체로 귀결된다. 그리고 다시 마를 즈음에는 지표면은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해진다. 같은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이은지의 기록매체 연습은 조각조각 나며 물리적으로 결별하고, 다른 연습과 화학적으로 결합하며 수정된 형태로 전승되고 만다. 문자기록의 매체들을 사용하면서 구술기록의 방식으로 응결되는 것이다.
작업이 작업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그 위의 기록은 세초되듯 한 번 지워졌다가 다시 사용된다. 그럼에도 일관되게, 이은지는 기록매체를 구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때마다의 시간에 대한 어떤 응답을 유도해왔다. 먹빛의 종이매체를 다루었던 연습 당시의 결론으로 말이다.
Media Cleansing
by Moon Seok Lee
The first thing you notice when you walk into the gallery are the six pieces of gray sculptures, which resemble the human fossils at Pompeii. They look like natural rough stones from a distance, but when you get up close, you will see the cracked surface of the paper pulp made from shredded papers. To make these sculptures, the artist Leeeunji shredded old magazines, free flyers, leftover papers from a fellow artist, and the drawings she had previously made. The paper that passed through the shredder becomes thicker than conifers and thinner than broad leaves. Thousands of texts and illustrations on these papers get completely disintegrated in the process. After soaking up these shredded pieces of paper in water, Lee makes them into a thick semi-fluid pulp. She then pastes the pulp on the armatures for her sculptures. Once the pulp is dried, it becomes the epidermis of her sculptures. Occasionally, you will see the paper leaves sticking out when not having been completely disintegrated; previous records of those papers are seen on these small paper leaves. Some audiences have approached these small clues and tried to figure out where these papers came from. Traces of the source can be confirmed only when approaching closer, but some of the sources are hung on the wall surrounding these rough, textured sculptures. The eleven ink drawings are not necessarily the materials used in the sculptures. However, the same drawings of those eleven drawings were used to make paper pulp for the sculptures.
The eleven drawings make us imagine what reference was used in creating the six sculptures, and the surface of the six sculptures remind us of the eleven drawings. We need to ask a question about how artworks – both on the wall and on the floor –indicate each other’s past and future in a cycle. Which time zone is the system corresponding to when positioned to face the drawing as a preliminary reference and the sculpture as a predetermined result?
If we acknowledge that the paper originated from mixing, liquefying, and drying vegetable fiber, we can see that the reproduction cycle of this recording medium has been actively used for a long time. Back in the Joseon Dynasty, there was a government department called Jojiseo, where they produced and preserved paper for federal use. Its site was in the vicinity of where Segeomjeong, Jongro-gu is now located. Hongjecheon is a stream that flows in front of the Segeomjeong, and is where people went to wash away the rough drafts of history. 'Silok' is a history book written after a king’s death, recording what happened during the reign of a male ruler. All the drafts of this book were cleansed in this stream.
To avoid historical disagreement, the vegetable soot stuck in between the paper fibers is discarded downstream. This process is called ‘Secho.’ Secho is a process of erasing the record of events that occurred during the reign of a king and reconstructing the record. During this process, there was a contest between records of the same affairs. Certain records were transferred over to high quality paper, and other disputed contents were shredded, soaked, and stored as recycled tissue. This was to narrow down the range of interpretation of the records. Also, paper was not small in value.
If we speculate about the Secho process, it recycled the ecosystem of paper, the recording medium, but the contents of the records were not circulated. Secho shows that the stronger voice takes over the weaker voice in the records. The authority to select what was to remain in the records became a power, and the records were circulated under this power. As the struggle between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dium and the record itself intertwined, the vegetable fibers became fragmented, washed out in water, kneaded, dried, stretched, and returned to the scene of recording.
Lee actively uses the recycling process of paper, and she does not let certain records to overpower another in her work. From magazines to her past works, various printed materials were shredded. There is no specificity over quality or type of paper she uses. Furthermore, the exhibition space is not only comprised of three-dimensional solidified paper paste, and her drawings do not solely exist to create three-dimensional objects. This tells us that the artist is not merely obsessed with paper paste or dried-up solid state. The records do not compete with each other, but become paper paste together. Thus, the sculpture surface becomes a kind of neutral zone. There are no hierarchies in two- or three-dimensions, but it seems that what the artist is trying to do is to create a strange ecosystem where the flat surface remains as a reference and the solid remains as a remainder.
Regarding the meaning of ‘leftover’, the <leftover> series could mean two things: one is that paper remains as a fibrous tissue, and latter a recording medium. Here, paper can be seen as an object mixed with recycles as its origin but also treated as one of the highly regarded recording mediums in history. Paper cannot be viewed separately from the former or the latter, because the craving for reproducible record led to paper. The <leftover> series create fragments of new works through the reproduction and archival characteristics of media. Beyond time and space, these fragments are traces of a given role of engraving the written records, showing the rubble that has been crushed for the creation of a certain record (new work). The life and death of a record is revealed from the two main characteristics of a medium.
Produced since 2016, <Leftover 03> barely reveals the traces of previous records, because the paper paste placed on top of the plastic basket has been soaked for a long time and lost its origin. On the other hand, most of the recent works created in 2019 use the paper itself as a frame, and the pieces that have not been shredded enough stick out and adhere on the surface. The liquefied paper pulp gradually hardens over time as moisture evaporates. The surface of dry paper is very different from that of the surface of pasty pulp; crushing and cockling. So, the paper pulp becomes more crushed and is full of chunks than when it was first put on. The coagulated movement usually refers to the moment of falling, and it also expresses the state when a video is paused. Just as the artist keeps her work in a certain state throughout the paper's recycling cycle, in the form of paper pulp, the form always stays in a certain static motion.
Is there a connection between the sculptures that look like still images and paper hovering in a certain state? As mentioned above, two-dimensional works are used as materials for creating three-dimensional works. If the drawings on the wall are the reference point for the sculpture’s form and medium, we need to postpone answering this question immediately and focus on the drawings. Behind the crowd surrounds several sumi ink colored bulbous bulbs. In <Heavy Breath> and <Breathing Space>, hands, fists, and the lower body from behind are illustrated with overlapping bulbs. The roots of massive trees are covered with soil in a sphere shape. The <Downtime> and <Breathing> series used water-based graphite, and for this reason the strokes here are in between the thickness of the short graphite stroke and the black ink line. As the stroke spreads, the mineral carbon substance was gently scattered to depict young plants and a human lying face down. In <Panting>, the texture of the ground or the bush rustling in the wind is expressed in graphite strokes. <Wheezing> is a human figure that is likely to fall while running in a cartoony way. The artist says that abstracting images of the body and later expressing more intuitively results in the image of the shape of a tree. Lee also reflected on how humans were often projected onto non-human beings or inanimate objects in East Asian painting history.
However, the origin of symbolism of an analogy between human figures and plants do not answer whether Lee's work is oriented towards the specific state of the medium called paper or paper pulp. In addition, the shape of bulbs often appears in the drawing, and the sculptures need to be more closely connected for them to express stationary movement. The artist has expressed a realistic hope that her work will be easier to move, and I do not know if this point can be a clue. The artist is considering different production methods because of the medium’s changing condition and weight. Compared to the lightweight sculpture, the wood board is heavy to move. The artist consistently pondered upon the issue of media. The link between the ambiguous state of 'remnants' and the appearance of flat, natural objects needs to be approached as a matter of media. The artist naming the exhibition title as “Holding Breath” reveals that the metaphor of “ambiguity” has to do with the problem in the ambiguity of media.
Let us talk about paper as a medium for reproduction and documentation; and about 'Secho' scenes again. On the day that Secho was happening, a banquet called Sechoyeon was held in Chailam. The selected memoirs were carried to the palace on a palanquin, while omitted records from the selection and the initial records were washed away with water. The day the unselected record was destroyed was the day the record selection was completed. We can call Sechoyeon as the cannibalism of the records, where obliteration and celebration within the records taken place at once.
However, the drawings and the sculptures in Lee’s studio do not result in such struggle while celebrating the completion or birth of the records. Instead, her sculptures that look like human fossils are holding their breath. This is because there is no hierarchy among the records, archives, and a recording medium in this ecosystem of ambiguity. For Lee, records are sometimes her own drawings and her drawings also get shredded with magazines and soaked in water to become a part of her sculptures. It continues to result in a certain form as paper porridge. So, it maintains the ecosystem of the media calmly and diligently as the paper is shredded and the records are blurred. Moreover, the artist tries to add attention to the material by limiting her color palette. The artist mainly uses ink to minimize the interpretation of color and to concentrate on the interpretation of media. Therefore, the form is recognized as none other than an ink form. When the printed material is crushed and soaked in water, the CMYK (Cyan, Magenta, Yellow, Black) values on printed material are mixed and become closer to an achromatic color.
The recurrence of the paper medium in a particular state is not related to the state of the media. It is intertwined with the artist’s concern over the medium and the state of ink. It is not the saturation value at 0 degree nor the brightness value at 0 degree, but the light when ink is settled on the paper surface and the light when the soaked paper fibers are entangled together. The color is not a result of blocking other colors, but from selecting a specific color of the spectrum, which is strictly part of the work. The practice of the medium becomes an ecosystem and flows steadily from the plane to the three-dimensional surface. An incomplete state of the practice reveals a three-dimensional human figure. The work repeatedly grinds and melts so that the plane becomes a three-dimensional skin. The creation of this ecosystem remains as a human fossil formed by the accumulation of dust in the “black medium.”
The artist seems to continue to make work on paper using sumi ink; only achromatic colors such as black and gray. Achromatic color appears when ink or water-based graphite is smeared onto paper. When the liquified carbon absorbs into the vegetable fiber tissue, the layers between black and white make waves according to the component’s density, dispersion, and breadth. These achromatic color waves line up vertically and horizontally like a waterway and remain as black characters against a white background. The backbone of the archival system in East Asia is a vegetable fiber with a dry carbon component. For a long time, the act of recording is indebted to black and white forest trails and waterways to leave texts. Most records wanted this entanglement of black and white materials to remain there for a long time. The aim of the written records is to keep the tradition of this form: the long-lived black waterways and black fruits forever hanging from the branches. However, Lee's practice of the recording media tends to push the act of documentation in one direction. At this time, the media practice she tried in the past becomes blurry. As the sumi ink drawings go back into the water, the dried black and white waterway bursts, and the vegetable fiber is submerged in water and the suspended carbon components are wiped out. The trajectory of the work piles up layer by layer, resulting in a thick fluid. By the time everything dries out again, the surface becomes bumpy. As if the same words changed gradually by a word of mouth. Lee's practice of recording media is fragmented, physically separated, chemically combined with other practices, and transmitted in a modified form. It is condensed in the manner of oral recording while using the method of written recording.
The work renews as a next work, but the record above gets erased like Secho process. Nevertheless, Lee has been converting written records into oral expression to elicit a response to each moment in time. This is the conclusion of the practice in dealing with ink-bit paper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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