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임과 울렁임의 몸짓 속에서¹
신지현 (독립 기획자)
이은지 작가의 개인전 «Creeper»는 두 가지 경로로 관람 가능했다. 첫 번째는 벽만큼 크게 나 있는 창을 스크린 삼아 ‘들여다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직사각형 화이트큐브 왼쪽 끝에서 출발해 내부를 ‘거니는’ 것이다. 전자가 전시를 ‘관람’하게 한다면, 후자는 전시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각각 유의미한 시점을 제공한다. 그 어떤 관람이 선행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가지 통로가 관람자로 하여금 전시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창 너머로 먼저 본 그곳에서 이상하게도 인상 깊었던 것은 그림보다 창에 비친 가로수의 잔상이었다. 누런 종이에 그려진 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조 이미지와 나무의 잔상이 뒤섞여 자아낸 붕 뜬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실재와 환영 사이의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었다. 전시장에 들어가 한 꺼풀 벗겨내고 눈을 들이밀어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도면을 손에 쥐고서.
#한 걸음
“뭉텅이” “뭉치” “덩어리”. 구체적 대상을 지시한다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인 상태로서 저기 저쪽에 둥글둥글 무리 지어 있음을 가늠케 하는 이 단어들은 이은지 작가의 작업 전반을 가로지른다. 도면에서 포착되는 <한 뭉텅이>, <두 뭉텅이>, <접힌 하나>, <가득 하나>와 같은 제목은 그 정체를 밝히기보다는 그저 대상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태에 머물며 그림과 자연스레 연동한다. 이 전시를 해독하기 위한 첫 번째 단서라 하겠다.
한편 ‘살금살금 걷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동시에 담벼락으로 서서히 번져나가는 덩굴, “크리퍼(Creeper)”는 어떠한가? 전시명이자 작품명이기도 한 “크리퍼”는 이 전시를 해독하기 위한 두 번째 단서라 부를 만하겠는데, 하나하나의 잎사귀가 덩굴손을 타고 벽을 잠식해 어느새 거대한 전체를 이루어내는 덩굴은 그 자체가 개별인 동시에 전체를 이루는 특성을 갖는다. 전시장을 크게 “벽 하나” “벽 둘” “벽 셋” “벽 넷”으로 구분해 뭉텅이째 갈라버린 작가의 구획법은 관객에게 각 작품을 개별자로 바라보기에 앞서 전체의 상황을 먼저 조망하길 요청한다. 그에 맞추어 원경으로서 바라보는 순간, 이 벽의 진짜 이름은 “하나 둘 셋 넷”이 아닌, “덩굴”(벽 하나, 벽 셋, 벽 넷)과 “덩어리”(벽 둘)였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덩굴처럼 벽을 타고 번져있는 덩어리들이 보인다.
#두 걸음
그곳은 덩어리들로 가득했다.² 하나하나를 살피자면 분명 정물이라 호명할만한 것들이었지만 벽 전체를 살핀다면 ‘덩어리의 풍경’이 분명했다. 무엇을 그렸는지 쉬이 파악할 수 없는 풍경 사이를 걷다 보니 그것은 웅크린 사람의 모양새였고, 어느 동물의 내장이면서 동시에 버려진 봉다리이기도 했다.
흑연을 재료 삼아 덩어리를 “만지며” 그가 선택한 색은 언제나 회색 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중립적인 색의 농도로만 형상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일견 그림자처럼도 보이는데, 그림자는 언제나 바닥이나 벽 등 어딘가에 들러붙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덩굴과 닮아있고, 구체성을 배제한 채 대상을 덩어리로써 뭉뚱그려 비춘다는 점에서는 다시 한 번 이은지의 그림과 만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림자의 존재 이면에는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종이에 남겨놓은 흔적은 일렁임과 울렁임의 몸짓으로 빛을 따라 덩굴처럼 번져 나가는 듯 보인다. 그런데 여기 정말 일말의 빛이 없는가? 그림을 다시 자세히 보자. 흑연도 뭉치면 반짝 빛이 나는 법. 이은지의 그림은 빛을 품은 그림자일까? 빛과 그림자 그 사이는 아닐까?
#세 걸음
바삭함과 축축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겹겹의 종이 사이로 전작 <숨 참기> 연작을 잠시 살펴보고 가자. <숨 참기> 연작은 작가의 작업에서 포착되는 조각적 시도로서, 얼핏 시멘트를 거칠게 부어 본뜬 상처럼 보인다. 주재료는 종이 곤죽이다. 기실 가볍고, 부드러우며 물이 닿으면 금세 물렁해질 만한 상태로 잠시 굳어있으면서도 몹시도 단단한 척 서 있는 조각이라 하겠다. 혼자서는 직립할 수 없는 재료인 종이를 엉겨 붙여 만든 ‘덩어리진’ 이 상태는 다시 한 번 개별이자 전체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자립에의 동력이 된다. 이 조각들을 «Creeper»에서 본 덩어리 풍경의 과거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금 여기는 과거의 조각이 오늘의 그림이 된 중간 기착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형상이 드러나면 지우고, 물을 끼얹어 흐르게 하는 한편, 어느 순간 탁 손을 떼어 대상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배제하는 그가 그리는 그림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지시하는 대상을 밀도 높게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작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불확정적인 감각을 스스로 조정하는 행위이자 관객에게는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대상에 대한 복합적 이해의 소지를 남기기 위한 조율 과정에 가깝다. 이를 ‘단정 짓지 않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로서 이해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이은지가 그려내는 덩어리들은 개별자와 전체, 주체와 객체, 정물과 풍경, 조각과 그림, 흑과 백 사이 중간 지점 어딘가를 배회하며 자립 가능한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는 것으로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네 걸음
전시는 덩어리를 “만지는” 과정 안에서의 “일시 정지” 상태라 말하는 작가에게 이다음 기착지는 어디쯤이 될까? 끊임없이 여기와 저기를 조율하며 중간 상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그가 향하는 곳은 도착 가능한 어느 세계가 아니라 ‘하기’로서 작동하는 생성의 세계, 닿았는가 하면 이미 행함의 수레바퀴에 얹어져 도착할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어느 세계³ 아닐까 상상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는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창밖에서 보았던 일렁이는 나무의 잔상과 합일된 어떤 이미지로 가득한 풍경일 것이고, 그곳에 사는 자는 희미한 모습으로 주위를 맴도는 존재, 추상적 기호로서 호명되는 그 자체가 이름이 되는 한 뭉치, 뭉텅이 그리고 덩어리일 것이다. 이다음이 궁금하니 어서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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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이제니의 시 <발화 연습 문장-남방의 연습곡>에서 발췌한 문장임을 밝힙니다.
² <pieces> 연작(2015-2017)에서부터 <re-birth> 연작(2016~), <숨 참기> 연작(2019-2020),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Creeper> 연작(2020~)에 이르기까지 이은지는 2차원 평면 위에서 이미지와 3차원의 공간 속 물질로서 모종의 “덩어리”진 상태를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작가는 이 덩어리에 대해 작가노트를 통해 “스스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응어리 같은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림과 조각과 같이 다른 상태간의 거리를 조율해나가며 중간지점을 찾으려는 작가의 시도로 볼 수 있겠다.
³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학과지성사, 2019, 15~16쪽.
In the Movement of Swaying and Drifting¹
by Jihyun Shin (Independent curator)
There are two possible ways to view Leeeunji's solo exhibition «Creeper». One is outside, ‘looking through’ a storefront window that is as big as the entire facade of a building, as if it were a screen. The other way is inside by ‘taking a stroll.’ Beginning from the entrance on the left end of the rectangular white cube and meandering through the space. Both ways provide meaningful viewpoints: the former makes you ‘see’ the exhibition, whereas the latter lets you ‘experience’ the exhibition. It does not matter which way you do first, but it is clear both approaches allow viewers to look at the exhibition in multiple dimensions. Before entering the space, what was surprisingly attractive to me was the reflection of the street trees on the window rather than the paintings. It felt like I was looking at something between reality and illusion–a buoyant, superimposed scene of gray images drawn on yellowish paper contrasted with the reflected images of trees on the window. Entering the gallery, I perused the paintings, carefully scrutinizing each one in detail. Of course, with the exhibition map in my hand.
#one step
“Lump” “bundle” “pieces”: These words encompass Leeeunji’s whole body of work. They indicate an abstract state of things existing somewhere together rather than a concrete object. Her titles, such as <a lump>, <two lumps>, <folded one>, or <full in one>, do not give any clues of what is represented. Rather, they describe a state before something is being revealed. These titles naturally synchronize well with her images. They are the first clues to help decipher the exhibition.
On the other hand, what does the exhibition title “Creeper” (referring to both ‘sneaking up to someone’ and a vine that gradually spreads to the wall) mean? As both the title of the exhibition and the pieces in the show, this word is our second clue. Vines have the characteristics of being an individual and a whole; each and every leaf rides on its tendril and encroaches on the entire wall. The artist partitions the gallery space into “1st wall,” “2nd wall,” “3rd wall,” and “4th wall.” This partitioning method suggests looking at the show broadly before looking at each piece individually. Accordingly, when looking at the whole exhibition from a distance, you will realize that the real names of the walls are not “1st, 2nd, 3rd, and 4th”, but “vines” (1st wall, 3rd wall, 4th wall) and “pieces” (2nd wall). Now it becomes visible that the lumpy pieces are spreading through the wall like vines.
#two steps
It was full of lumpy pieces.² If you look at each one, it's definitely something you could call a still life. However, if you look at the entire wall from a distance, it becomes clear that it is a wall of ‘the landscape of lumps’. Walking through this landscape where you can't easily grasp what is represented, the landscape starts to take the shape of a person crouching, the intestine of an animal, or, at the same time, an abandoned plastic bag.
Using graphite and “touching” the lumps, the color she chooses always stays within the range of grayscale. At first glance, her paintings look like shadows in that they can reveal their shapes only in grayscale. Because shadows always stick to floors or walls and exist somewhere, they tend to resemble vines. Like Lee’s paintings, shadows are always blurry, obscuring a concrete image or understanding of the object. What should not be forgotten here is the fact that light always exists on the other side of the shadows. The traces she left on the paper seem to spread like vines, following the light with the movement of swaying and drifting. But is there really no light here? Let's look at her paintings again. If graphite is condensed, it also shines. Then, do Leeeunji's paintings of shadows bear light? Or, are they between light and shadow?
#three steps
Let’s take a look at Lee's previous work <Breath-holding>; between the layers of paper where you can feel crispy and wet at the same time. This series is a sculptural expression of the artist that looks like roughly poured cement sculptures. However, the main material is paper pulp. It is a sculpture that is hardened temporarily and pretends to be very solid. In fact, it is light, soft, and in a state that quickly breaks down when water touches it. This ‘lumpy’ state made out of paper, a material that cannot stand alone, recalls the state of being individual and whole. At the same time, it becomes a driving force for self-reliance. If these sculptures are the past tense of the lumpy landscape in «Creeper», could we consider this show a layover of her early sculptures becoming her current painting?
The artist actively tries to avoid the concrete representation of the object by pouring water on the surface when a shape starts to show what it is and finishing intentionally at the moment when it is hard to notice what is drawn on the surface. The goal of her painting is not in revealing what is drawn. Her goal is both an act of self-adjusting the uncertain sensations that she has in her mind and leaving the audience with a complex understanding of objects that have not yet been revealed. If it is possible to acknowledge this as ‘not conclusive, not sure, and having possibilities,’ the lumpy figures in her paintings can be deciphered as the things that are wandering somewhere in between individual and whole, subject and object, still life and landscape, sculpture and painting and halfway between black and white and looking for a new place to become self-sufficient.
#four steps
Where will the next layover be for the artist who says that an exhibition is a temporal “pause” in the process of “touching” the lump. Given that the artist is someone who constantly adjusts between here and there and tries to keep the balance in the middle, I imagine the place she is heading for is not a world that can be reached, but the world of creation that operates with a “doing” attitude. It is an unreachable work world, cogs continually moving on top of cogs.³ The scenery of the world would be filled with superimposed images of swaying trees outside, reflected on the window, just like I saw before entering the gallery. The one who lives in this world would spin around, a form barely visible, and their name is an abstract sign like a lump, bundle, or pieces. I am curious about what comes next in this “pause”, so let's press the play bu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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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This title is extracted from Jenny Lee’s poem <A Sentence of Speaking Practice_Etudes Australes>.
² Throughout the artist’s series <pieces> (2015-2017), <re-birth> (2016~), <Breath-holding> (2019-2020), and <Creeper> (2020~), Leeeunji has constantly depicted some kind of a “lumpy” state as an image on a two-dimensional surface and a substance in a three-dimensional space. The artist once said about this lump as "a something that cannot be clearly explained" in her artist statement. I understand this is the artist's attempt to find a balance by adjusting the distance between the past and present, and painting and sculpture.
³ Hyesoon Kim, Do Womananimalasia (Seoul: Moonji, 201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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